Here&There, Chit Chat

비 오는 저녁...

Sth Btwn Us 2014. 8. 10. 20:33


  오후부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냥 비도 아니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기상청에서 태풍이 하나 더 온다고 그러던데 아마 그것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도 밥은 밖에서 먹고 싶어서 밖에 나갔다. 티셔츠, 반바지, 쪼리. 비 오는 날은 이렇게 나가는 게 알파요 오메가다. 비 오는 날 긴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으면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진다. 물이 고인 곳도 피하게 되고, 우산이 비를 막아주는 영역 밖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을 수 도 없다. 어차피 젖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러게 된다. 그런데 쪼리를 신으면 신경 안 써도 돼서 좋다. 또 고인 물 웅덩이에 첨벙첨벙 발을 튕기는 재미도 있다. 나는 이러는 걸 정말 좋아한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그러지는 않지만, 혼자서 걸어갈 때면 일부러 물 웅덩이로 찾아가서 첨벙거린다. 그러면서 발에 묻은 모래들을 떨어내기 위해 그랬노라고... 되뇌인다. 비 오는 날은 쪼리신고 첨벙거리는게 제 맛이다.

 

  가고 싶었던 곳이 있어서 애오개역까지 걸어갔다. 애오개역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쭉 늘어서 있다. 빗방울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공기는 이상야릇한 플라타너스 향기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서 냄새가 가득하다. 이 향기를 맡을 때마다 항상 나는 묘한 기분이 든다. 특히 밤에 걸어가면서 이 향기를 맡으면 그 묘함이 한 층 더 배가된다. 마치 노란 나트륨 조명의 재즈바에 앉아서 싱글몰트를 홀짝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스칼렛 요한슨이 나타나서 등에 손을 넣어서 척추뼈를 하나하나 만져주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렇게 늘어서 있는 플라타너스들 중에서 마포경찰서 입구에서 여섯 번째 플라타너스... 나무 밑둥에 나무 번호표가 있는데 이 플라타너스는 몇 번인지 까먹었다. 이 플라타너스는 유독 가지들과 잎사귀들이 땅바닥과 가깝게 뻗어 있다. 손 뻗으면 바로 닿을 정도의 높이까지 말이다. 왜 이렇게 아래쪽까지 뻗어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하다가 애오개역에 도착해서야 지갑을 두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가서 지갑을 들고 다시 나왔다. 도로 애오개역을 향해 걸어가는데 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커플들이 보였다. 비 오는 날 커플들을 보면 나는 이상하게도 흐뭇해진다.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비 오는 날은 절대로 우산을 따로 쓰면 안된다. 반드시 같이 써야 된다. 남자는 여자를 한 팔로 끌어안으면 금상첨화다. 그래야 따뜻하니까.. 둘 중 하나는 한 쪽 어깨가 젖을테지만 비 오는 날 커플은 우산 한 개로 다녀야된다.  


  지갑 가지러 왔다갔다하는 통에 진이 빠졌다. 그래서 그냥 태복에 가기로 한다. 혼자서 찹쌀탕수육을 주문해서 먹었다. 돼지고기에도 밑간이 잘 되어 있고, 후추를 섞어 만든 튀김옷도 간이 적절하고 바삭거려서 좋았다. 소스에는 양파, 당근, 파인애플, 오이, 레몬, 아오리 사과가 들어 있었다. 요즘 아오리사과가 나올 철이라 그런 것 같다. 소스도 적당히 달큼하고 시큼해서 좋았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스였다. 그걸로 부족해서 볶음밥을 시켰다. 볶음밥은 당근 죽순, 계란, 부추, 느타리 버섯을 넣고 굴소스를 섞어 볶았다. 짜장을 곁들여 줬는데 짜장은 별로 필요가 없다. 그냥 볶음밥만 먹어도 맛있다. 





  다 먹고 집에 와서는 포트와인을 홀짝였다. 비 오는 밤에는 유독 엘비스 프레슬리가 부른 Crying in the Chapel가 생각난다. 한없이 푹신한 소파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 와인 한 잔, 치즈 몇 조각, 엘비스 프레슬리라면 아무래도 좋다. 


  첨벙거릴 수 있어서, 플라타너스 향기에 취할 수 있어서, 우산 같이 쓸 수 있어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생각나서, 나는 비 오는 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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