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rchive/The Art of Combat

리돌포 카포 페로Ridolfo Capo Ferro의 레이피어 검술서

Sth Btwn Us 2016. 2. 12. 02:27




  최근에 이런 저런 이탈리아, 독일 검술서들을 번역하면서 처음에 느꼈던 것은 검술서들이 서술되는 방식, 검술에 접근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나라 별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최근 본 검술서들은 이탈리아의 쟈코모 디 그라씨Giacomo Di Grassi, 아킬레 마로쪼Achille Marozzo, 안토니오 만치올리노Antonio Manciolino의 사이드 소드 검술서(1570, 1536,1531), 니콜레또 지간티Nicoletto Giganti의 레이피어 검술서(1606, 1608), 독일의 요아힘 마이어의 사이드소드 파트(1570),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의 초호화 검술서(1548), 위 - 피터 폰 단치히의 롱소드 해설서(1452)이다. 철저히 리히테나워류 원리에 기반한 롱소드 검술서인 단치히 1452와 짜깁기 집대성의 최고봉인 파울루스 헥터 마이어의 검술서를 제외하고 나머지 검술서를 비교해보면 독일 검술서는 무기의 특성, 해당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의 특성, 그에 맞는 가드와 패리 방법, 공격법 등을 하나하나 정의하고 그에 따른 조합 연계 활용법 까지 꼼꼼하게 적어 놓는다. 반면 이탈리아의 검술서들, 레이피어와 사이드소드 검술서들 전부 검투의 핵심 원리라고 할 만한 것들은 거의 적어 놓지 않고 곧장 기술 공방 예시로 들어간다. 특히 마로쪼 1563의 경우 5 페이지 잡소리 하고 곧장 소드앤버클러 예시로 직행하는 식이다. 지간티 1606의 경우도 비슷하다. 레이피어 핵심 원리라고 할 만한 Measure, Tempo, Guard 등을 꼴랑 4 페이지에 걸쳐 간단하게 설명하고 나서 곧장 삽화를 통한 설명에 들어간다. 

  이렇게 원리 설명 없이 곧장 예시로 들어가게 되면 해당 검술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복원하고 실제로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검술의 근본 원리를 모르고 그냥 아샬티Assalti,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카타形만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해당 검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복습 차원, 원리를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예시들에서 검술의 원리를 역설계해나가야 한다. 

  특히 레이피어는 찌르기 뿐만 아니라 베기로 적게 유효타를 입힐 수 있는 롱소드나 사이드 소드와는 달리, 베기를 거의 하지 않는 찌르기 위주의 검이다. 이러한 무기의 특성 때문에 전투 방식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레이피어는 찌르기 위주가 되다보니 공격을 들어오는 루트와 그것을 행하는 방식이 앞의 두 무기에 비해 상당히 압축적으로 바뀐다. 그래서 가드도 총 4 개(Prima, Seconda, Terza, Quarta)로 줄어든다. 또한 레이피어는 검신이 짧게는 90 cm에서 길게는 120 cm 이상이기 때문에 적과의 거리 재기, 템포 맞추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히테나워류에 입각하여 레이피어 검술을 접근하면 성과가 좋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다른 검리 체계에 기반한, 다른 검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리가 설명되어 있지 않으면 복원하는 입장에서 매우 고달프고 애로사항이 꽃 피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이탈리아 검술서에 적잖이 실망하고, '이탈리아인'이 '이탈리아 놈'으로 바뀌어 갈 무렵 이탈리아의 펜싱 마스터 리돌포 카포 페로Ridolfo Capo Ferro의 레이피어 검술서를 보게 되었다. 사실 산 지는 오래 되었지만 이탈리아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펜서가 톰 레오니Tomasso Leoni였고 팀 멤버를 통해 레오니의 번역이 좋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보지 않고 있었다. 그랬지만 어쨌든 반쯤 포기하고 읽어 나가는데 딱 이거다 싶었다. 지간티와는 달리 뻘소리가 적고 레이피어의 핵심 원리라고 할 만한 것들을 하나 하나 정의하고 각각의 활용법을 쭉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1. 검투를 행할 때 적의 손을 보라. 그리고 어디로 움직일 지 파악하고 판단을 하라.', '2. 무턱대고 공격해 들어오는 적에게는 반템포 플레이를 하라.', '3. 레이피어 검투에서 페인트 동작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 빈틈을 너무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4. Full Cut, Parry, Riposte에 이어서 Cavazione하지 말라.', '5. 공격할 수 있는 템포는 이러한 시점이다.' 등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길게 설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삽화를 통한 공방 예시로 들어간다. 이탈리아 놈들 사이에서 이탈리아느님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영역된 검술서가 그리 많지 않아 교차검증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레이피어는 카포 페로만 믿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놈들이 노답이라는 것을 취소한다.  




P.S.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이드소드까지는 베기 비중이 높기 때문에 리히테나워류 적인 해석으로 접근해도 충분히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요아힘 마이어도 자신의 리히테나워류 검리를 토대로 사이드소드 검술을 분석하기도 했다. 서로 완전히 다른 검리 체계인 롱소드와 레이피어 사이에 사이드 소드가 끼어 있는 것이다. 레이피어 + 롱소드가 사이드소드 라고 본다.